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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예배

추도예배 말씀[고향을 찾는 나그네 - 히11:13-16]

by 알짜선생 202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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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11:13-16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히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말씀 : 고향을 찾는 나그네

언제나 나그네가 호텔 방에 들게 되면 숙박계를 쓰게 됩니다. 첫째: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출신지) 둘째: 지금 무엇 하러 여기에 왔습니까? (용무) 셋째: 몇일 동안 이곳에 머물다 가실 것입니까? (숙박일) 넷째: 내일은 어디로 갈 것인가? (행선지)를 기록합니다.

1.영혼의 고향을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우리 한국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1만 6000㎞나 되는 먼 바다로 나갔다가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모두들 떠나온 길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좀 더 높은 지위를 갖기 위해,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저마다 고향을 떠났습니다.

언제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까?... 몸이 병들었을 때, 늙고 쇠약해 졌을 때, 머나먼 이국땅에서.... 특별히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고향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육신의 고향이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이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의 그 안타까움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영적 실향민'은 정말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 품', 우리가 장차 돌아갈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도서 12:7절에 "흙(육신)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1:13-15절에서는 "이 사람들(아브라함, 믿음의 조상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참된 고향, 우리의 본향은 바로.... 하늘나라, 천국인 것입니다

본문 11장 15절~16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잇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우르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향으로 생각하고 가기를 갈망했던 곳은 그 갈대아우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라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든지 갈대아우르로 가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이 진정한 고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머물렀던 한 시점이나 장소를 고향이라 하지 않고 미래에 돌아갈 곳 천국을 자기의 고향으로 고백하며 그 곳으로 가기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날이 어둡고 차가 막혀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고 싶은 고향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내 생애에 7주일만 남았다면 이란 책에서 모래성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어떤 한 아이가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습니다. 장난감 삽으로 모래를 퍼다가 양동이에 담고, 그 모래를 가지고 멋진 성을 만듭니다. 성벽도 아름답게 쌓고, 성안에 멋진 못도 만듭니다. 아름답고 거대한 모래성이 완성되었습니다.

또 한 편 어떤 한 남자가 사무실에 있습니다. 그는 책상위에 있는 서류들을 다른 서류들 위에 올려놓으며 임무들을 수행합니다. 수화기를 어깨 위에 걸치고 손가락으로 번호를 누릅니다. 숫자놀음이 시작되고 계약이 체결됩니다. 만족스럽게 계약되었고 그에게는 수익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처럼 사는 동안 내내 그 일을 할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예측하고, 배당금을 받고, 수익을 얻고 그렇게 해서 그만의 제국이 세워질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이 비유를 하면서 두 사람(소년과 남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합니다. 공통점은 두 사람이 제각기 자기의 성을 쌓은 건축가라는 점에서 똑같고, 보이지 않는 많은 알갱이들로 화려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똑같고, 부지런하고 의지가 결연하다는 점에서 똑같고, 두 사람 모두에게 조수가 밀려오고 끝이 올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남자는 마지막 때를 무시하지만 소년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황혼이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올 때 소년은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습니다. 하루 종일 바닷가에 머무르면서 나에게 곧 마지막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년은 파도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밀물이 밀려 들어와서 자기가 쌓아놓은 모래성을 뒤덮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도가 가까이 밀려 들어와도 그 지혜로운 아이는 깡충깡충 뛰며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슬픔도, 두려움도, 후회도 없습니다. 아이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내게 밀물이 어느 순간에 밀려올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썰물과 밀물처럼 왔다가 밀려가는 날들이 계속되고, 계절이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내게 황혼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날마다의 태양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너의 성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준비되었지만 한 사람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평온한 가운데 있지만, 한 사람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인간은 고향을 찾는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찾는 사람입니다. 고향을 떠나면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고향을 찾아 돌아가 사는 것이 꿈이요 삶의 과제인 우리 인생을 가르쳐 `나그네`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고향에 대한 생각을 안 하다가 자기의 육신에 병들고 아프면 고향 생각을 합니다. 또 사업에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고향 생각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은 가진 돈이 있을 때, 허랑 방탕 할 때는 고향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죽자 살자 하던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 들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에 병들자 그제야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정 우리가 찾고 떠나야 할 고향은 어디인가? 더 나아가 성경에 있는 대로 더 나은 본향은 어디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2. 영적인 고향을 찾는 아브라함

이성봉 목사님은 천국복음을 외치고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 천국을 가봤느냐? 가보지도 못한 천국 얘기는 하지도 말라'고 했을 때, "내 마음에 예수를 믿고서 천국 지점이 생겼소. 이렇게 지점이 있는 것을 볼 때, 본점이 있는 것으로 확신하오"하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몸이 태어난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어릴적 정다운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을 등 뒤로 하고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가다보니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 가나안 땅을 육신의 정착지로만 삼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정착지로까지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 그곳에 먼저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으로 취급을 당하였고 멸시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되돌아갈까 생각도 했고 이곳 보다 다른 지역이 더 기름지고 풍요롭다 여겨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건만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대로 지역을 옮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낸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이 육신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영적으로 약속 받은 축복의 땅 '가나안 땅'임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 가뭄을 만납니다.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생기고 땅에 먹을 것이 없자 먹을 것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수치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먹을 것을 잔뜩 얻어 가지고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이 결코 너희가 머무를 땅이 아니고 오로지 참 고향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임을 알게 하고자 깨달을 때까지 훈련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두 번째로 가뭄이 다가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애굽 땅이 아닌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오히려 물질을 얻어갔고 나옵니다.

고향에 대한 하나님의 숨은 비밀과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연속적인 실패와 수치를 통해 깨닫습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축복의 땅 약속의 땅 영혼의 참 고향임을 깨달은 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혹시나 훗날에 후손들이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우리 땅이니 이 땅에서 나가라 하면 후손들이 고통을 받을까봐 이번에는 정식으로 돈을 주고 막멜라 굴이 있는 언덕의 조그만 땅을 삽니다. 이 땅이 확실하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영토임을 온 천하에 알리는 행위였습니다. (창23:17-20)

만일 이때에 아브라함이 아직까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임을 알지 못했다면 그 땅을 사기를 주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약속 받은 축복의 땅임을 확인 한 이후 아브라함은 아내가 죽자 그곳에다 시신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어 그곳에 묻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브라함처럼 가나안에서 살다가 죽어 거기에 묻혔습니다. 그 아들 야곱도 잠시 가나안을 떠나 외삼촌 라반에 집에서 지냈지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음은 물론 야곱도 죽어 막멜라 굴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셉은 애굽 땅에서 국무총리가 되어 편히 그곳에서 살 수 있었지만 내가 죽거든 내 뼈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 막멜라 굴이 있는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00여 년이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 성공하므로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수 24:32).

이러한 고향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나오미와 그의 가족들은 가뭄으로 인해 모압 땅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두 자부들을 얻어가면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려 하였지만 그곳은 약속의 땅이 아닌 고로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어버리는 혹독한 아픔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약속의 고향 땅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담긴 참 고향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이방 신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에덴동산을 잃듯이 조상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자손들이 만든 고향을 잃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의 나라 땅에서 포로로 이방인으로 살면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행한 죄악을 뉘우치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맹세하고 마음으로 잊혀진 고향을 찾아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고향은 아브라함도 그 자손도 앞으로 올 미래도 돌아갈 과거도 하나님 약속으로 주시는 가나안 땅 뿐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자신의 몸이 태어난 과거의 고향을 찾습니다.. 거기에서 사는 기쁨을 얻고 삶의 슬픔을 달래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당하였던 부끄러움과 애굽의 고통과 바벨론 포로의 슬픔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모든 인간의 고향 되신 하나님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3. 고향을 만드는 나그네

1박2일 여행을 할 때도 준비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야곱은 그가 바로 왕의 앞에서 (창 47:9)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으며,(타향살이) 대상 29:15절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영적 고향 참 고향을 만들 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저 하늘에 고향 즉 본향(本鄕)을 만드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에 내가 영원히 사는 고향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고향을 잃어 이방 땅에 살던 이스라엘이 죄를 회개하고 가나안에 돌아오는 것처럼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탕자로 살던 죄인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참 고향은 흙으로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 있고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게 해준 집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도 주일이면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형제자매를 만날 때 삶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반대로 하나님 아버지를 잃고 교회를 떠나서 세상 속에서 살 때 참 평안이 없고 참 기쁨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서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복이 되지 않습니다(요 15:4,5).

집을 떠나 사는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볼 일 때문에 혹은 어려운 사정으로 여기저기를 다니며 머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에 가진 것이 많으면 다니기가 불편하므로 언제나 그날그날 필요한 것만 가지고 다닙니다. 그리고 머무는 곳에서 주어진 일이 있으면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하지만 재산은 자신이 앞으로 영구히 살을 집이 있는 곳에 모읍니다. 귀하고 값진 보물도 앞으로 만드는 고향집에 가서 살려고 준비합니다.

임시 머무는 곳에는 어떤 삶의 기반도 많은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앞으로 나그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무거운 짐이요, 얽매이는 사슬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나그네는 본토 사람들에게 의심과 미움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본토 사람들에게 외국인이나 나그네의 사회적인 지위는 노예보다 조금 나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면 본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부자로 살면 트집을 잡아 수모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나 이방 사람들은 자기 나라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소망하며 기다림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언제나 나그네일 뿐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사랑해서 그 삶이 좋으면 안 됩니다. 죄를 먹고 세상을 즐기는 이 땅의 삶이 언제나 낯 설은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까닭 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맞지 않는다고 차별을 당하고 여러 면에서 손해를 본다. 그래서 교회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와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필요한 말씀으로 축복해주십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저 하늘나라에 준비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가난하게 살고 무시 받고 살고 부족함이 많은 모습가운데 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귀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할 수 만 있다면 물질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쓰려고 합니다. 이 믿음은 성도들이 만드는 하늘 고향에 보물을 쌓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다른 차원의 성도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설과 추석 명절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찾습니다. 복잡한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탑니다. 승용차를 타고 몇 시간, 어떤 곳은 하루 진종일 고속도로에서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향을 찾는 웃음이 있고 무엇인가 기대를 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과 손에 든 것이 있는데 그 물건이 고향 계신 부모 형제들에게 나누어 드릴 선물들입니다.

고향에는 산과 들이나 집 건물을 보려고 가지 않습니다. 나를 낳아 사랑으로 길러주신 그리운 부모님을 뵈오려고 갑니다. 그 동안 보고 싶었던 형제들을 만나러 갑니다. 고향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모님이 이날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들딸들이 올 것을 생각하고 며칠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돌아갈 때는 그들 손에 들려 보낼 이것저것 땀 흘려 농사한 것을 챙기십니다.


Ⅲ.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고향 길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집에 가는 것도 사람이 좋아서 가고 집을 나가는 것도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다. 고향에 부모 형제가 있지 않으면 가도 명절이 즐겁지 않고 명절이 되어도 사는데서 보내고 맙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 되어 하나님을 고향 삼고 찾아오는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믿음의 자녀가 하나님을 찾아오는 명절이요, 예배는 하나님 준비하신 은혜의 천국잔치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하나님께서 챙겨 주시는 풍성한 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땅에서 나그네 되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자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성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늘 본향 되신 하나님께 가는 사람은 아버지가 기뻐하실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선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예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실 영광스런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좋은 때를 준비하십니다.

명절에 고향을 가시거나 집에서 계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와 자식을 만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보면서 예수의 피 값으로 형제자매가 된 교회 가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교회당 건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뵈오러 나왔습니다. 절대 떠나거나 끊어질 수 없는 교회 가족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오늘을 복되게 사십시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으로 이 날을 즐겁게 만듭시다. 고향에서 만난 오랜 친구처럼 한없이 사랑하고 예뻐하고 껴안아 줍시다. 고향의 기쁨을 아는 자는 나눔의 기쁨을 아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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